본문: 창세기 1장 1절 참고 본문: 요한복음 1:1–3; 골로새서 1:15–20; 고린도전서 15:20–28; 로마서 5:12–21; 에베소서 1:3–10, 2:10; 히브리서 11:1–3; 베드로후서 1:3–4; 요한계시록 21:1–5, 22:13 A. 서론: 광야의 시련과 창조주의 선포 구약의 백성들이 출애굽한 후 시내산 광야에 머물던 시기, 모세는 성령의 감동하심을 따라 창세기를 기록하여 이스라엘의 손에 쥐여주었습니다. 10대 재앙과 홍해의 기적을 눈으로 보고도 이스라엘은 눈앞의 척박한 광야와 메마름 앞에서 끊임없이 불평하고 원망했습니다. 그들은 약속의 땅보다 애굽의 ‘떡과 고기’를 그리워했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 대신 가시적인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섬겼습니다. 이것은 ‘물질문명의 인과율과 거래적 신앙에 사로잡힌 죄인의 비참한 본성’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즉시 가나안에 들여보내지 않으시고 가혹한 광야를 통과하게 하신 까닭은 그들이 미워서가 아닙니다. 자신의 백성들이 ‘자기 힘으로 구원을 따내려 하는 율법적·거래적 종교성’을 깨뜨리시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존재임을 인격적으로 설복시키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창세기 1장 1절은 바로 이 광야 같은 세상을 걸어가는 자기 백성들에게 “너희는 누구이며, 너희의 존재와 역사는 어디서 시작되어 어디로 향하는가?”를 알게 하시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정체성 선포이자 구원 스토리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은 세상의 기원과 주권자가 누구인지 선포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우리의 삶과 역사는 우연이나 인간의 성취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의 근원이 하나님이며, 창조와 구속과 새 창조의 목적도 그분의 뜻 안에 있습니다. B. 본론 1. “태초에” - 창조의 시작과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완성 창세기 1장 1절의 첫 단어는 히브리어 בְּרֵאשִׁית(베레쉬트)입니다. 전통적으로 “태초에”라고 번역하며, 창조의 시작을 가리킵니다. 이 단어의 사전적 의미 자체가 “그리스도 안에서” 또는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창세기의 히브리어 단어와 신약의 “첫 열매”라는 표현을 직접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¹ 창세기 1장 1절이 문맥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해석상의 논쟁이 있습니다. 전통적인 최초 사건 견해(메러디스 클라인(Meredith G. Kline), 번 포이트레스(Vern S. Poythress), 존 콜린스(C. John Collins), 존 커리드(John D. Currid), 빅터 해밀턴(Victor P. Hamilton))는 1절을 창조의 첫 사건으로 읽고, 2절을 창조된 땅의 초기 상태에 대한 설명으로 이해합니다. 반면 브루스 월트키는 1절을 1장 3–31절에 기록된 여섯 날의 창조를 요약하는 문장으로 해석합니다. 버논 포이트레스는 이에 반대하여 1절이 요약문이 아니라 실제 창조의 첫 사건을 서술한다고 논증합니다. 메러디스 클라인도 1절을 단순한 표제가 아니라 창조 역사의 초기 단계에 관한 독립된 진술로 이해합니다.²
이 논쟁에서 “독립절”이라는 문법적 분류와 “요약문”이라는 문맥상 기능은 구별해야 합니다. 독립된 문장도 문맥에서 요약 기능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설교의 핵심은 어느 한 해석을 성급히 단정하는 데 있지 않고, 본문이 분명히 선포하는 진리, 곧 하나님이 천지의 창조주이시며 창조 세계의 주권자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신약은 이 창조주 하나님을 성자와 분리하여 말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장 1–3절은 만물이 말씀(예수 그리스도, 성자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지음 받았다고 선포합니다.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1)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한복음 1:1-3)
골로새서 1장 15–17절은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되었다고 증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창세기 1장 1절의 히브리어 자체가 그리스도를 뜻한다고 주장하지 않으면서도, 성경 전체의 증언에 따라 창조가 성자 하나님과 분리될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³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1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골로새서 1:15-17)
바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고전 15:20)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고린도전서 15:20)
이 표현은 창세기 1장 1절의 “베레쉬트”를 번역한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장차 그분께 속한 자들의 부활을 보증한다는 뜻입니다. 첫 창조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새 창조의 시작을 드러내셨고, 마지막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을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계 21:1–5).
2.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 만물의 근원이신 하나님
창세기 1장 1절의 “창조하시니라”는 בָּרָא(바라)라는 동사입니다. 구약에서 이 동사는 특별히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서술하는 데 사용됩니다. 그러나 이 동사의 어휘적 의미만으로 “무에서 창조(creatio ex nihilo)”라는 교리의 모든 세부 내용이 자동으로 증명되는 것은 아닙니다. 무에서의 창조 교리는 창세기 1장 전체와 히브리서 11장 3절 등 성경의 여러 본문을 함께 살펴 교리적으로 설명해야 합니다.4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히 11:3) “하늘과 땅”은 성경에서 창조 세계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늘”이 히브리어에서 복수형으로 나타난다는 사실만으로 이 단어가 반드시 하나님의 보좌와 모든 영적 세계를 뜻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성경은 하나님께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고 분명히 가르칩니다(골 1:16). 그러므로 물질세계가 악하거나 무가치하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창조 세계는 하나님의 선한 창조이며, 동시에 하나님 자신과 혼동되어서도 안 됩니다. 칼빈은 피조 세계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창조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우상이 아니라 창조주의 지혜와 능력을 증언하는 무대입니다.5 히브리서 11장 3절은 보이는 세계가 눈에 보이는 재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가르칩니다. 이 말씀은 믿음이 눈에 보이는 현실을 넘어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신뢰하게 한다는 뜻이지, 모든 물질적 삶을 단순한 그림자나 거짓 실체로 취급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성도는 창조 세계를 감사함으로 누리되, 그것을 창조주보다 더 사랑하거나 의지하지 않습니다. 3. 삼위일체 하나님과 창세 전의 구속 언약
창세기 1장 1절의 “하나님”(אֱלֹהִים, 엘로힘)은 형태상 복수형 명사이지만, 이 문장에서는 단수 동사 בָּרָא(바라)와 함께 사용됩니다. 따라서 엘로힘의 복수형 형태만으로 삼위일체 교리를 증명한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삼위일체 신앙은 창세기 1장 1절 한 단어에만 근거하지 않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관한 성경 전체의 증언을 종합하여 고백합니다(마 28:19; 요 1:1–3; 고후 13:13).6 개혁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과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연결하여 설명할 때 ‘구속 언약(pactum salutis)’이라는 교리적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 표현은 성부께서 구원의 계획을 세우시고, 성자께서 자발적으로 중보자의 사명을 담당하시며, 성령께서 구원의 적용을 이루시는 삼위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을 가리킵니다. 이는 성경 한 구절에 “삼위 사이의 언약”이라는 문구가 그대로 등장한다는 뜻이 아니라, 성경의 여러 본문을 종합한 개혁주의 신학의 설명입니다.7 에베소서 1장 3–10절은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백성을 택하시고, 때가 찬 경륜 가운데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하시려는 뜻을 세우셨다고 선포합니다. 따라서 구속은 인간의 타락 이후에 하나님이 급히 마련하신 임시방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지혜와 뜻에 따라 구속의 역사를 이루시며, 인간의 죄도 그분의 거룩한 계획을 좌절시키지 못합니다. 게할더스 보스의 성경신학은 ‘하나님의 계시와 구속 역사가 목표를 향해 진행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 관점에서 창조는 그 자체로 중요하고 선하지만, 성경의 이야기는 창조에서 멈추지 않고 죄와 구속을 거쳐 새 창조의 완성으로 나아갑니다. 우리는 이를 “하나님께서 창조를 시작하실 때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실 완성을 목적하셨다”는 구속사적 관점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8 이 말을 종종 사람들의 입을 통해“종말이 창조를 앞선다”라는 표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람과 언약을 맺으시며, 쪼갠 제물 사이로 연기 나는 화로와 타는 횃불이 지나갑니다(창 15:17). 이 장면은 언약의 성취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신실하심에 달려 있음을 보여 줍니다.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제물이 되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이 횃불 언약을 성취하셨습니다. 4. “나를 위한 하나님”에서 “하나님을 위한 나”로 - 창조의 목적과 예배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하시는 목적은 단지 우리가 더 편안하고 성공적인 삶을 사는 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지음 받았으며, 그분을 사랑하고 섬기며 이웃을 사랑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에베소서 2장 10절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하나님의 작품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 2:10) 출애굽기 3장 12절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뒤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출 3:12)
여기서 “섬기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עָבַד(아바드)는 문맥에 따라 ‘일하다, 섬기다, 예배하다’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구원은 하나님을 이용해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거래가 아닙니다. 구원받은 백성은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합니다.
베드로후서 1장 4절은 성도가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고 말합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벧후 1:4)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과 동일한 존재가 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과 성령의 역사로 죄의 부패에서 벗어나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삶에 참여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성숙은 자기 의를 쌓는 일이 아니라 은혜 안에서 거룩함과 사랑의 열매를 맺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의 자랑이나 자신의 종교적 성취를 최종적인 의지처로 삼지 않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가치가 다른 모든 것을 능가한다고 고백했습니다(빌 3:7–14). 광야 같은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리를 붙드시고, 그리스도를 닮아 가게 하시며, 마침내 교회를 흠 없는 신부로 세우실 것입니다(엡 5:25–27). C. 적용 및 결론: 창조주를 신뢰하며 새 창조를 소망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광야 같은 인생의 시련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잊게 하고 눈앞의 것만 붙들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1장 1절은 우리가 사는 세계가 우연이나 인간의 능력에서 비롯되지 않았음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그분의 지혜와 주권은 우리의 이해보다 큽니다. 그렇다고 모든 고난의 구체적인 이유를 우리가 안다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며,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을 붙드신다는 사실입니다(롬 8:31–39). 첫 창조의 주님은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창조의 첫 열매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의 현실을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이 마지막 말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알파와 오메가이신 주님께서 약속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오늘 우리에게 맡겨진 자리에서 신실하게 살아갑니다. 우리의 자랑과 주권을 내려놓고, 창조하시고 구속하시며 완성하시는 삼위 하나님을 신뢰합시다. 나를 위한 하나님을 만들려는 마음에서 돌이켜, 은혜로 지음 받고 구원받은 자답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섬깁시다. 창조주이시며 새 창조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각주 (Chicago/Turabian) 1. 창세기 1:1의 בְּרֵאשִׁית(베레쉬트)는 문법적으로 연계형 여부를 둘러싼 논의가 있으며, 이 단어 자체가 “그리스도 안에서” 또는 “첫 열매”를 뜻하지는 않는다. 히브리어의 형태·통사 논쟁은 Robert D. Holmstedt, “The Syntax of Genesis 1:1–3,” Journal for Semitics 31, no. 2 (2022)를 참조하라. “첫 열매”는 고린도전서 15:20의 그리스어 ἀπαρχή(aparchē)이다. 2. Vern S. Poythress, “Genesis 1:1 Is the First Event, Not a Summary,”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79, no. 1 (2017): 97–121; Bruce K. Waltke, “The Creation Account of Genesis 1:1–3 Revisited,”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86, no. 1 (2024): 13–31; Meredith G. Kline, “Space and Time in the Genesis Cosmogony,” Perspectives on Science and Christian Faith 48, no. 1 (1996): 2–15. 클라인과 포이트레스는 1:1을 창조의 초기 사건으로 이해하지만, 월트키는 1:1을 6일 창조 기사의 요약으로 해석한다. 3. 요한복음 1:1–3; 골로새서 1:15–20. 이 본문들은 창조와 성자의 관계를 명시적으로 가르친다. 따라서 그리스도 중심적 창조 신학은 신약의 명시적 증언에 근거해 제시하는 것이 안전하다. 4. 히브리서 11:3은 믿음으로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고, 보이는 것이 나타난 것에서 비롯되지 않았음을 가르친다. 창조 교리와 creatio ex nihilo의 신학적 정식화는 이 본문을 창세기 1장 및 다른 창조 본문들과 함께 읽어 설명해야 한다. 5.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ed. John T. McNeill, trans. Ford Lewis Battles, 2 vols.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60), 1.5.1. 칼빈은 피조 세계를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게 하는 무대로 묘사한다. 6. 창세기 1:1의 אֱלֹהִים(엘로힘)은 형태상 복수형이지만, 창세기 1:1에서는 단수 동사 בָּרָא와 함께 쓰인다. 삼위일체 교리는 이 형태만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마태복음 28:19, 요한복음 1:1–3, 고린도후서 13:13 등 성경 전체의 증언을 종합하여 고백한다. 7. 구속 언약(pactum salutis)은 성부·성자·성령의 영원한 구원 경륜을 설명하는 개혁주의 신학의 교리적 정식화다. 이 교리를 성경의 한 구절에 직접 쓰인 문구로 제시하기보다, 요한복음 6:37–40; 17:1–5; 에베소서 1:3–10; 디도서 1:1–3 등의 본문을 종합한 신학적 설명으로 제시하는 것이 적절하다. 개혁주의 교리적 논의의 예로 Herman Bavinck, Reformed Dogmatics, vol. 2, God and Creation, ed. John Bolt, trans. John Vriend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04)을 참조하라. 8. Geerhardus Vos, Biblical Theology: Old and New Testaments (Edinburgh: Banner of Truth, 1975). 보스의 성경신학은 계시와 구속 역사의 유기적·목적론적 전개를 강조한다. “종말이 창조를 앞선다”를 보스의 직접 인용으로 사용할 경우에는 사용하는 판본의 정확한 문구와 쪽수를 별도로 대조해야 한다. 9. 창세기 15:17은 쪼갠 제물 사이로 연기 나는 화로와 타는 횃불이 지나갔다고 서술한다. 이 장면을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 및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연결하는 것은 구속사적·정경적 해석이지만, 창세기 본문 자체의 직접 진술과 신약에 비추어 도출한 신학적 적용을 구분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