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I. 부록 (APPENDICES) A. 정의—앞서 제시한 것보다 상세한 정의 우리가 어디에서 동의하고 어디에서 의견을 달리하는지 분명히 하려면, 먼저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의 의미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창세기 1–3장을 둘러싼 논의에는 여러 용어가 등장하며,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은 같은 용어로 서로 다른 의미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용어들을 정의하고, 이 보고서에서 어떤 의미로 사용하는지 밝혀야 합니다. 여기에는 ‘문자적’(예: “우리는 창세기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편이다”), ‘역사적’(예: “창세기 1–3장이 역사적 서술임을 확언하는가?”), ‘시적’(예: “창세기 1장의 서술은 시적인가?”), ‘창조론/창조론자’(예: “창조론자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등이 포함됩니다. 우리의 목적은 PCA 안에서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주요 쟁점과 결론을 큰 윤곽으로 제시하는 것입니다. 1. 문자적 (Literal) 개신교인으로서 우리는 본문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무엇을 뜻하는가? 이 용어는 중세 시대에 본문의 여러 의미, 곧 ‘문자적’ 의미와 ‘비유적’ 의미 등을 구분하던 논의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오늘날에는 흔히 ‘문자적 해석’을 비유나 수사적 표현을 전혀 허용하지 않고 모든 표현을 물리적·표면적 의미로만 읽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 보고서에서 말하는 문자적 해석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본문이 문맥과 문법, 장르, 저자와 독자의 의사소통 상황 안에서 전달하려는 의미를 찾는 해석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단서를 두는 이유는 ‘문자적’이라는 말에 혼동을 일으킬 수 있는 다른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할 때, 흔히 우리는 비유적 표현을 고려하지 않고 가장 물리적이고 표면적인 의미로 이해한다는 뜻으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대중적 의미가 언제나 적절한 성경 해석의 원칙은 아닙니다. 이 점을 창세기 1–3장 해석에 적용하면, 우리는 모세와 그가 이끌었던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의사소통 행위에 주의를 기울이게 됩니다. 해석의 중요한 요소는 모세가 무엇을 말하려 했고, 당시 청중이 그 말을 어떻게 이해했을 것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서술 방식에 비유적 요소가 있는지 여부를 미리 결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복음서의 기록을 조화시키기 위해 복음서 저자들이 사건을 반드시 시간 순서가 아니라 논리적 주제에 따라 배열했을 가능성을 인정해도 문제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복음서의 역사성이 조금이라도 훼손되는 것은 아닙니다. 적절한 ‘문자적’ 해석이 반드시 연대순 배열을 요구하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고백을 따르는 장로교인들은 창세기 1–3장의 서술이 스스로 역사성을 주장할 뿐 아니라 실제로 역사적으로 참되며, 따라서 우리가 믿어야 할 가치가 있다고 확언해 왔습니다. 2. 역사적 (Historical) 일상적인 언어에서 어떤 기록이 ‘역사적’이라고 할 때, 이는 저자가 시공간 세계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을 믿도록 제시하는 기록이라는 뜻입니다. 창세기 1–3장은 역사성을 주장하며, 교회는 그 내용이 실제로 참되다고 고백해 왔습니다. 역사적 서술이라는 말은 반드시 모든 사건이 오늘날 독자가 기대하는 방식으로 시간 순서에 따라 기록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신앙고백을 따르는 장로교인들은 창세기 1–3장이 역사적 기록이라는 주장뿐 아니라, 그 기록이 실제로 역사적으로 참되다는 점도 주저 없이 확언해 왔습니다. 3. 언어학적 용어 (Linguistic Terms) 해석학을 논할 때에는 언어학과 문학 연구에서 사용하는 여러 용어가 중요합니다. 가. 시적 (Poetical) 일상적인 말에서는 ‘시적’이라는 표현을 ‘역사적’ 또는 ‘사실적’, 그리고 ‘문자적’이라는 표현과 대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시가 외부 세계의 실제 사물을 가리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대중적 정의의 사례는 J. R. R. 톨킨의 『반지 원정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메리와 피핀이 “우리는 떠나야 해! 우리는 떠나야 해! 날이 밝기 전에 길을 떠나리!”라는 후렴의 노래를 부른 뒤, 프로도는 그 노래를 칭찬하면서도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할 일이 많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피핀은 그것은 시였을 뿐이라며 정말 날이 밝기 전에 떠나겠다는 뜻은 아니었다고 답합니다[139]. 그러나 문학적·언어학적 관점에서 ‘시적’이라는 말은 언어의 종류와 문체에 초점을 둡니다. 리듬이 있을 수 있고, 특히 상상력 있는 묘사와 독자가 현장에 있는 듯 느끼도록 하는 표현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런 언어는 반복이나 암시를 사용하여 일반 산문보다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특별한 일을 찬양하거나 애도하고, 이야기를 다시 들려주는 즐거움을 주거나, 청중이 사물을 새롭게 보도록 하는 것이 시적 언어의 목적일 수 있습니다. 이 의미에서 어떤 글을 ‘시적’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그 글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예: 사사기 5장). 어떤 이들은 창세기 1:1–2:3의 언어를 ‘시적’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이 언어학적·문학적 의미의 시적 특성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많은 독자는 대중적 정의에 따라 이 표현을 역사적 진실성의 부정으로 받아들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이 본문을 ‘시적’이라고 부르는 것 자체도 정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고양된 산문 서술’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합니다. 이 표현은 히브리어를 능숙하게 읽는 독자가 느끼는 축제적 분위기와 정교한 언어 패턴을 포착하면서도, 문법적으로는 서술문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 줍니다. 나. 유비 (Analogy) 『웹스터 신세계 대학사전』(1999)은 유비를 “그 밖의 점에서는 서로 다른 사물들 사이에 어떤 측면에서 존재하는 유사성, 부분적인 닮음”이라고 정의합니다. 논증이 “핵심을 정확히 짚었다”고 말할 때에도 두 대상 사이의 유사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유비를 해석하는 핵심은 무엇이 서로 비슷하고 무엇이 다른지 정확히 확인하는 데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화자의 세계와 언어 관습을 잘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개에 대한 반응은 문화마다 다르므로, 화자와 청중이 개에 대해 서로 다른 관념을 가진다면 해석에 오류가 생길 수 있습니다. 주해와 신학에서 중요한 유비에는 은유와 의인법이 있습니다. 은유는 명시적으로 ‘같이’ 또는 ‘처럼’이라고 말하지 않고 유사성을 암시하는 표현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마 5:13)이라고 말씀하시거나 야고보가 “혀는 불”이라고 말할 때(약 3:6), 사람 자체가 물리적으로 소금이거나 혀가 불이라는 뜻이 아님을 알기 때문에 유비가 사용되었음을 이해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려면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소금이 어떤 기능을 했는지 알아야 합니다. 의인법은 하나님을 인간의 형태나 속성을 지닌 분처럼 말하는 표현입니다. 느헤미야가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귀’와 ‘눈’을 언급할 때(느 1:6), 하나님께서 인간처럼 공간적으로 제한된 분이 아니심을 알기에 이를 의인법으로 이해합니다. 모세가 “여호와께서 엿새 동안 하늘과 땅을 만드시고 일곱째 날에는 쉬며 숨을 돌리셨다”고 말할 때도(출 31:17), 하나님께서 피곤해지시는 분이 아니므로 쉼과 회복이라는 표현은 의인법입니다. 하나님의 질투나 진노는 실제적인 것을 가리키지만, 인간의 질투와 진노에 있는 불순함은 하나님께 없습니다. 유비는 우리의 모든 사고에 기초가 됩니다. C. S. 루이스는 개별적으로 감각할 수 있는 사물을 가리키는 일을 넘어 원인과 관계, 정신 상태나 행위를 생각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불가피하게 은유적 표현을 사용한다고 지적했습니다[141]. 바빙크도 하나님을 의인법적 언어로 말할 권리가 하나님께서 피조물 가운데 거하시며 피조물을 통해 자신의 이름을 계시하시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그분 자신 그대로 볼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는 유한한 인간의 이해에 맞추어 자신을 낮추어 알려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진술을 단지 ‘유비에 불과하다’고 치부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유비적 표현이라고 해서 실제를 가리키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진술은 실제 사물이나 사건을 가리키며, 우리가 경험하는 다른 사물과의 유사성을 통해 그것을 묘사합니다. 4. 철학적 용어 (Philosophical Terms) 다음 항목들은 세계관에 관한 논의를 포함하므로, 보고서에서 사용하는 몇 가지 철학적 용어를 정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 애매어 사용의 오류 (Equivocation) 대부분의 단어는 여러 의미를 가지며, 그런 단어는 다의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논증에서 단어의 의미가 달라졌음을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거나, 한 의미에서 참인 것이 다른 의미에서도 참이라고 가정하면 ‘애매어 사용의 오류’를 범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 교회 사람들은 모두 마음에 평안을 누리므로 세상에도 평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안다”는 주장은 ‘마음의 평안’과 ‘세계의 평화’라는 서로 다른 의미를 혼동합니다. 일상적인 용법에서 ‘애매하게 말하다’는 것은 듣는 사람이 예상하는 것과 다른 의미로 단어를 사용하거나, 의도적으로 모호한 표현을 쓰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보고서에서는 논증을 평가할 때 사용하는 기술적 의미, 곧 서로 다른 의미를 혼동하는 오류라는 뜻으로 이 용어를 사용합니다. 나. 형이상학 (Metaphysics) 이 보고서에서 형이상학은 세계가 어떤 것이며, 그 구성 요소들이 어떻게 상호작용하고, 하나님께서 그 모든 일에서 어떤 역할을 하시는지에 관한 신념을 뜻합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세계를 어떻게 알 수 있는지, 하나님께서 세계 안에서 어떻게 일하시는지에 관한 논의가 포함됩니다. 신학자들은 이 항목에서 ‘제2원인’의 성격과 하나님의 섭리와의 관계, 그리고 ‘기적’ 또는 ‘초자연적 사건’의 의미 등을 다루어 왔습니다. 다. 자연주의 (Naturalism) 자연주의는 세계가 스스로 존재하며, 하나님께서 세계 안의 어떤 대상이나 사건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으신다고 보는 형이상학적 입장입니다. 라. 이신론 (Deism) 이신론은 하나님께서 세계를 창조하셨지만 그 이후에는 세계의 작동에 관여하지 않으신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역사적으로 이신론자들은 최초의 창조 사건 이후의 모든 것에 관해 대체로 자연주의적 형이상학을 취했습니다. 마. 지질학 용어 (Geological Terms) 여기서는 지질학 용어인 격변설과 동일과정설도 다룹니다. 격변설은 지질학적 현상들이 지속적이고 균일한 과정이 아니라 자연의 격변적 교란에 의해 발생했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홍수 지질학’은 노아 시대의 대홍수라는 격변으로 세계의 많은 특징을 설명하는 격변설의 한 형태입니다. 격변설은 흔히 젊은 지구 지질학과 연결되지만, 둘의 연결이 필연적인 것은 아닙니다. 19세기 초에는 오래된 지구를 인정한 지질학자들을 포함하여 다수의 지질학자가 기독교적 격변설을 지지했습니다[143]. 동일과정설은 자연법칙이 변하지 않으므로 현재 작용하는 과정들로 지구의 지질학적 역사를 설명할 수 있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19세기에 지질학의 지배적 견해가 되었고 오늘날에도 널리 받아들여집니다. 그러나 동일과정설에는 서로 구분해야 할 두 형태가 있습니다. 첫째, 실질적 동일과정설은 지구의 역사 전반에 걸쳐 지질학적 과정의 강도와 속도가 동일하게 유지되었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1830년 찰스 라이엘의 『지질학 원리』와 관련된 이 입장은 오늘날 지질학자들 사이에서 널리 지지되지는 않습니다. 둘째, 방법론적 동일과정설은 과정 자체는 동일했더라도 지구의 역사에서 그 속도와 강도는 달라질 수 있었으며, 따라서 지구의 역사에는 격변적 격동이 포함될 수 있다고 봅니다. 이는 현대 지질학에서 흔한 입장입니다. 이 입장 자체는 노아 시대의 역사적 홍수나 기적의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동일과정설이라는 말에 두 의미가 있다는 사실은 의사소통의 문제를 낳습니다. 지질학자들이 균일성의 원리를 말할 때 실질적 의미와 방법론적 의미 중 어느 쪽을 가리키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많은 창조론자는 격변설의 대안이 동일과정설뿐이라고 생각하며, 이를 실질적 동일과정설로 이해하기 때문에 격변설을 옹호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을 가진 현직 지질학자 데이비스 영은 현대 지질학이 방법론적 동일과정설만을 주장한다고 봅니다[144–145]. 초자연적 사건을 선험적으로 배제하기 위해 균일성의 원리를 사용하는 것은 신학뿐 아니라 과학철학의 관점에서도 강한 비판을 받아야 합니다. 반면 자연이 일정한 질서를 보인다는 믿음 자체는 기독교의 초자연주의와 모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연은 역사적 기적을 만들어 낼 수 없으므로, 기적은 자연 자체에서 비롯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기독교의 입장입니다. 또한 동일과정설과 다윈주의 사이에 필연적인 연관성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찰스 라이엘은 오랫동안 다윈의 이론에 반대했습니다. 5. 창조론 (Creationism) ‘창조론’이라는 말의 어원은 우주가 하나님의 창조물임을 확언한다는 뜻이며, 따라서 자연주의와 같은 세계관은 참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대중적 용법에서는 이 용어를 흔히 젊은 지구 창조론, 곧 창세기의 날들이 연속되고 서로 이어지는 달력상의 날들이므로 지구와 우주의 나이가 약 1만 5천 년 미만이라고 보는 견해를 가리키는 데 사용합니다. 젊은 지구 창조론은 대체로 창세기 1장의 달력상의 날 해석과 관련되지만, 창조의 날 해석과 지구의 나이 문제를 구별하는 사람들도 있으며, 일부 견해는 이 두 문제를 서로 다르게 다룹니다. 신적 창조를 믿는 다른 견해들도 있습니다. 역사적 기독교 신앙의 범위에 분명히 들어오지 않는 이신론적 견해는 여기서 다루지 않습니다. 오래된 지구 창조론은 자연과학이 우주의 나이를 수백만 년 또는 수십억 년으로 판단하는 것이 정확할 수 있다고 인정합니다. 이 범주에는 두 하위 유형이 있습니다. 첫째는 유신론적 진화론자 또는 ‘진화적 창조론자’로, 하나님의 통상적 섭리 아래 지속되는 자연 과정, 곧 섭리의 제2원인들을 통해 생명과 인류가 출현했다고 봅니다. 이 견해는 아래에서 다룰 ‘진화’라는 말의 특수한 정의를 사용합니다. 둘째는 흔히 점진적 창조론자라고 불리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작동하는 제2원인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 그 과정에 초자연적이고 창조적인 행위를 더하셨다고 봅니다. 일반적으로 그러한 창조 행위는 창세기 1장의 명령들에 대응한다고 이해합니다. 다만 본문에 기록된 명령들이 모든 창조 사건을 빠짐없이 열거한 것인지, 대표적인 사건들만 제시한 것인지, 그리고 창조 사건들 사이에 생물학적 변화가 어느 정도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견해가 다릅니다. ‘점진적 창조론’이라는 용어가 오늘날의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한 시점을 특정하기는 어렵습니다. 1871년 찰스 하지의 『조직신학』(1권, 556–562쪽)은 최초의 창조, 즉 무로부터의 창조와, ‘제2원인과 연합하여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창조를 형성하는 제2의 창조 또는 점진적 창조를 구분합니다. 그러나 이때의 ‘점진적 창조’는 오늘날의 특정한 의미와 같지는 않습니다. 1954년 버나드 램의 『기독교의 과학과 성경관』(76–79, 155, 191쪽)은 이 용어를 오늘날에 가까운 의미로 사용합니다. 점진적 창조론자와 젊은 지구 창조론자는 자연 과정과 통상적 섭리만으로 세계를 설명하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핵심 주장에 동의합니다. 그러므로 둘 다 초자연적 창조론 또는 특별 창조론의 범주에 속합니다. 두 입장이 공통으로 확언하는 초자연적 사건에는 우주의 기원, 생명과 생물 다양성의 기원, 인간의 기원이 포함됩니다. 이러한 공통점 때문에 두 진영의 많은 사람은 ‘지적 설계’라는 이름 아래 협력할 수 있습니다. 6. 진화 (Evolution) 오늘날의 세계에서 분별력을 발휘하려는 신자에게 ‘진화’라는 단어의 의미를 정확히 구별하는 일은 가장 어려운 과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자연주의를 과학으로 제시하는 대중적 설명자들 가운데 많은 이가 이 단어의 의미를 바꾸어 사용하며 논증합니다. 그 결과 신자들은 이 단어가 사용될 때마다 자연주의적 함의가 들어 있다고 의심하기도 합니다. 이 단어의 기본 의미는 ‘시간에 따른 변화’입니다. 이는 변화가 어떤 방식으로 일어났는지, 변화의 범위가 얼마나 넓은지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는 단순한 기술적 진술입니다. 예를 들어 언어학에서는 어떤 기제를 전제하지 않고도 ‘게르만어 방언들의 진화’를 말할 수 있습니다. 우주론자들이 ‘우주의 진화’를 말할 때도 단지 우주가 시간에 따라 변화해 왔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형이상학적 주장을 하고 있다면 그들은 그 의미를 이 용어 안에 숨겨 두고 있는 셈입니다. 이 기본 의미는 생물학에서도 사용됩니다. 오늘날 관찰되는 생물은 화석에서 발견되는 생물과 관련이 있으며, 그 차이는 후손에게 유전된 유전적 변화와 관련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딩고(dingoes)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이 데려온 집개(domestic dogs)에서 진화했다고 서술하는 저자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또한 집개가 늑대에서 진화했다고 서술하는 저자들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때로는 이 두 주장을 같은 저자가 하기도 합니다. 딩고의 경우 그 과정은 자연적인 것이지만, 오늘날의 생명체가 최초로 생겨나는 과정에 대해서는 초자연적 행위가 개입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을 수 있습니다. 생물학에서 ‘진화’가 이 의미로만 사용된다면 오늘날과 같은 논쟁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초자연적 창조론을 믿는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도 여러 종 사이의 유전적 관련성이 어느 정도인지를 두고 의견이 다를 수 있습니다. 개와 코요테가 공통 조상을 공유하는가? 개와 여우는 어떠한가? 개와 고양이는 어떠한가? 그러나 그들은 모두 자연 과정만으로 오늘날 관찰되는 생명체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는 주장을 거부할 것입니다. 오늘날 문화에서 지배적인 진화관은 대개 강한 자연주의적 형이상학 주장을 포함하며, 이것이 ‘진화’라는 말에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합니다. 예를 들어 미국 생물교사협회(NABT)는 1997년 공식 진화 교육 성명에서 다음과 같이 정의했습니다[147]. “지구상의 생명 다양성은 자연선택, 우연, 역사적 우발성, 변화하는 환경의 영향을 받는, 예측할 수 없고 자연적인 유전적 변형을 동반한 시간적 계승이라는 진화 과정의 결과다.” 이 정의는 하나님의 특별하거나 초자연적인 활동을 배제합니다. 또한 과학을 정의하는 방식에서도 그러한 배제가 나타납니다. 이는 진화론이 종교에 관해 침묵하며 신의 존재를 반박하지도 지지하지도 않는다는 그들의 주장과 역설적으로 모순됩니다. 비유신론자는 NABT 성명의 이전 표현, 즉 진화를 “감독받지 않고 비인격적이며 예측할 수 없는 자연적 과정”이라고 정의한 표현을 더 선호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자연주의적 진화 설명은 찰스 다윈(1809–1882)의 이름을 따라 흔히 ‘다윈주의’라고 불립니다. 다윈의 『종의 기원』은 1859년에 출판되었고, 제6판은 1872년에 나왔습니다. 다윈이 생물학적 진화를 처음 주장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기여는 유전되는 작은 변이에 자연선택이 작용하여 어떤 형태가 생존하는지를 결정한다는 기제를 제시한 데 있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적자생존’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제6판에서는 허버트 스펜서에게서 이 표현을 받아들였습니다. “생명체가 처음 생겨나는 데 필요한 모든 조건이 오늘날에도 존재한다고 흔히 말합니다. 그러나 암모니아와 인산염, 빛, 열, 전기 등이 모두 존재하는 따뜻하고 작은 연못에서 단백질 화합물이 화학적으로 형성되어 더 복잡한 변화를 겪을 준비가 되었다고 상상할 수 있다 하더라도—정말 엄청난 가정이지만—오늘날에는 그런 물질이 곧바로 삼켜지거나 흡수될 것입니다. 생명체가 아직 형성되지 않았던 때에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윈 자신은 무신론자는 아니었지만 이신론자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찰스 하지는 이 이론의 자연주의적 성향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그는 『조직신학』(2권, 12–24, 27–33쪽)과 특히 『다윈주의란 무엇인가?』(1874; Baker 출판사 재간행, 1994)에서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생물학적 세계사에서 창조 행위를 배제하는 것은 사실상 무신론과 다름없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그러나 현대의 진화론은 엄밀히 말해 다윈주의가 아니라 ‘신다윈주의’입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발전한 이 이론은 1900년 이후 유전학의 발전을 활용하여 형질이 어떻게 전달되고 돌연변이가 유전자 풀에 어떻게 들어오는지를 설명합니다. 또한 다윈의 ‘따뜻하고 작은 연못’을 연상시키는 생화학적 진화, 곧 무생물에서 생명이 발생했다는 ‘생명 자연발생설(abiogenesis)’도 포함했습니다. 생존에 유리하도록 유기체의 적합성이 향상되는 것보다, 유전자를 번식을 통해 전달하는 성공이 강조됩니다. 앞서 인용한 NABT 성명은 이러한 견해를 배경으로 하며, 특별하거나 창조적인 하나님의 활동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엄밀한 의미의 유신론적 진화론자는 이 설명을 받아들이지만, ‘목적 없는 자연 과정’이라는 표현 대신 하나님께서 다양한 생명체로 발전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세계를 설계하고 유지하시는 지혜를 강조합니다. 예로는 칼빈대학의 하워드 반 틸(Howard Van Till)이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 말한 ‘유신론적 진화론’의 정의는 그 견해의 배후에 있는 형이상학을 기준으로 한 것입니다. 대중적 용법은 더 넓고 일관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오래된 지구 창조론의 모든 유형을 이 용어로 부르며, 어떤 사람들은 대규모 생물학적 발전이나 모든 포유류의 공통 조상을 인정하는 오래된 지구 창조론만을 가리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모든 생명체의 공통 조상을 인정하는 견해를 모두 유신론적 진화론이라고 부릅니다. 신앙고백을 따르는 장로교인들에게 역사적으로 중요한 유신론적 진화론의 한 유형은 아담의 몸이 진화적 발전의 산물이며, 하나님의 섭리 아래 제2원인만으로 형성되었고, 아담의 특별 창조는 고도로 발달한 유인원형 생물에게 이성적 영혼이 주어진 사건이라고 보는 견해입니다. 이 견해는 제임스 우드로와 벤저민 워필드(적어도 그의 초기 경력)와 관련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1–2장의 주해는 이 구성에 강한 비판을 제기합니다. 존 머리는 창세기 2:7에서 사람이 하나님의 생기를 받음으로 생명 있는 존재가 되었으므로, 그 이전에는 그런 존재가 아니었다고 관찰했습니다(Collected Writings, 2:8). 인간의 몸에 동물 조상이 있었다면 그 조상들도 이미 생명 있는 존재였어야 합니다. 인간론의 관점에서도 인간은 몸과 영혼의 통일체이며, 몸은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하므로 제2원인만의 산물로 설명할 수 없다고 이 보고서는 주장합니다. 끝으로 이러한 ‘유신론적 진화론’은 인간 영혼을 뒷받침하는 능력의 발달을 자연주의적으로 설명하면서 인간을 동물과 구별하는 요소의 신적 기원을 인정하려 하므로, 서로 양립하기 어려운 형이상학적 입장을 결합한 불안정한 혼합이라고 평가합니다. 이 보고서에서는 명확하고 형이상학적으로 일관된다는 이유로 앞서 정의한 보다 엄밀한 의미의 ‘유신론적 진화론’에 한정해 논의합니다. 이 의미에서 진화는 자연주의적 의미의 진화와 연결되지만, 자연주의 대신 통상적 섭리만이 작용한다는 주장을 내세웁니다. ‘진화’라는 말의 형이상학적으로 중립적인 의미, 즉 시간에 따른 유전적 변화 자체는 기독교 신앙에 본질적으로 반대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흔히 자연주의적 진화론을 ‘증명’하는 데 사용됩니다. 실제로 이는 서로 다른 의미를 혼동하는 오류에 의한 증명입니다. 이러한 사례는 미국 과학교사협회(NSTA)의 1997년 「진화 교육 성명」에서 볼 수 있습니다[149]. “가장 넓은 의미에서 진화는 우주가 역사를 지니며 시간에 따른 변화가 일어났다는 생각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은하, 별, 지구, 지구상의 생명체를 살펴보면 과거와 다른 상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생물학적 진화는 생명체들이 공통 조상을 공유하고 그로부터 갈라져 나왔다는 과학 이론을 가리킵니다. 다윈은 이를 ‘변형을 동반한 계승’이라고 불렀습니다. 천문학, 물리학, 생화학, 지질연대학, 지질학, 생물학, 인류학 및 기타 과학 분야에는 진화가 일어났다는 풍부하고 일관된 증거가 있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형이상학적으로 중립적인’ 의미를 사용하여 여러 학문 분야에 적용합니다. 그러나 이어서는 더 강한 주장을 합니다[150]. “진화가 일어났는지 여부를 둘러싼 과학자들 사이의 논쟁은 더 이상 없다. 진화가 어떻게 일어났는지, 즉 변화를 일으킨 과정과 기제, 그리고 우주의 역사에서 실제로 무엇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상당한 논쟁이 있다. 과학자들은 설명에 관해 흔히 의견을 달리한다.” 이 주장은 그 문서 앞부분의 다음 진술과 함께 살펴보아야 합니다[151]. “과학은 자연 세계를 설명하는 방법이다. 우주가 규칙성에 따라 작동한다고 가정하고, 체계적인 탐구를 통해 그 규칙성을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과학의 방법론은 자연 현상에 대한 여러 설명을 경험적 자료와 비교하여 논리적으로 검증하는 것을 강조한다. 과학은 자연적 과정으로 자연 세계를 설명하는 데 한정되므로 설명에 초자연적 인과를 사용할 수 없다. 초자연적 힘은 과학의 관할 밖에 있으므로 과학은 그것에 관해 진술할 수 없다. 자연적 원인을 탐구하는 데 집중했기 때문에 과학은 우리의 지식을 증진해 왔다.” 이 정의에 따르면 자연 과정에 근거한 설명만 과학으로 인정되며, 따라서 그것만이 우리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를 적절히 설명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결국 자연주의적 진화론만이 우리 자신과 세계를 설명하는 ‘과학적’—다시 말해 ‘참된’—설명이 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이 논의는 ‘공통 조상’ 교리가 자연주의적 진화론의 핵심 전제라기보다 그 자연주의적 세계관에서 나온 결과임을 보여 줍니다. 모든 생명체가 공통 조상을 공유하지만 그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으로 개입하여 변화를 일으키셨다고 믿는 사람은 이 보고서가 엄밀하게 정의한 의미의 ‘유신론적 진화론자’가 아닙니다. 이는 그러한 견해를 지지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 견해를 정확한 범주에 놓으려는 것입니다. 자연적 사건과 초자연적 사건의 역할을 서로 다르게 이해하는 초자연적 창조를 ‘유신론적 진화론’이라고 부르는 것도 적절하지 않습니다. ‘진화’와 관련해 미시진화와 거시진화도 구분해야 합니다. ‘미시진화’는 일정한 한계, 즉 유형이나 종류 안에서 일어나는 시간에 따른 유전적 변이를 가리킵니다. 예를 들어 갈라파고스 제도의 핀치새들(finch)은 섬마다 이용할 수 있는 씨앗과 곤충의 종류에 적응하여 부리(beaks)의 형태가 다릅니다. 이 새들이 본토에서 이주해 온 핀치새의 후손이며 이러한 변화가 미시진화의 결과라는 점은 대체로 인정됩니다. 그러나 이 용어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한계 안에서의 변이를 말할 뿐 새로운 유전적 혁신이 어떻게 도입되는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몇 가지 예외를 제외하면, 관찰된 미시진화는 집단의 유전적 구성에 이미 존재하는 특성을 선택하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이는 선택적 교배와 비슷합니다. ‘거시진화’는 ‘종류’의 경계를 넘는 진화를 뜻합니다. 예를 들어 무척추동물에서 척수가 생겨나는 것은 누구의 정의에 따르더라도 거시진화적 발전입니다. 자연주의적 진화론에 반대하는 이들은 실제로 관찰된 진화는 미시진화이며, 그것만으로는 순전히 자연적 과정에 의한 거시진화를 입증하기에 거리가 멀다고 지적합니다. 작은 변화들이 축적되어 척수와 같은 중대한 혁신을 만들어 낼 만큼 충분했다는 사실을 관찰한 사람은 없다는 것이 이 보고서의 주장입니다. 7. 과학 (Science) 앞서 논의한 자연주의적 진화관의 배후에는 ‘과학’에 관한 특정한 정의가 놓여 있습니다. 미국 과학교사협회(NSTA)의 성명은 과학을 자연 세계를 설명하는 방법이라고 정의합니다. 이 정의의 핵심 문장은 “과학은 자연적 과정으로 자연 세계를 설명하는 데 한정되므로 설명에 초자연적 인과를 사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152]. 이 정의에 따르면 과학은 적어도 방법론적으로 본질상 자연주의적입니다. 이러한 ‘방법론적 자연주의’가 ‘형이상학적 자연주의’, 곧 자연적 원인만이 존재한다는 주장으로 확장되는 것을 막기는 어렵습니다. 과학의 사회적 위상이 높고 과학 지식이 공적이며 검증 가능하고 참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자연주의적 성향은 ‘세련된 합리적 사고’의 일부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 결과 많은 신자가 과학이나 과학적 사고를 신앙과 직접 대립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이 정의에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아야 할 몇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우선 ‘과학’이라는 단일한 실체가 존재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단어는 추상명사를 인격화한 표현일 뿐입니다. 실제로는 여러 과학 분야가 있으며, 공통점이 있더라도 연구 대상과 방법, 때로는 결론도 다릅니다. 따라서 진화생물학에서 발견되는 자연주의가 우주론이나 지질학 역시 자연주의적이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둘째, 인용한 정의는 자연 세계의 규칙성을 연구하는 데 초점을 맞춥니다. 선한 창조와 하나님의 포괄적 섭리를 믿는 우리는 자연적인 것들이 자연적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초자연적 개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전제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행성의 움직임을 설명할 때마다 하나님의 특별한 행위를 호출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역사적 사건을 연구하는 학문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 자연적 원인만을 고려하는 것은 자연적 요인만이 관련되어 있다고 미리 믿을 충분한 이유가 있을 때에만 합리적입니다. 홍해가 갈라진 사건, 대각성운동, 인간의 기원 등을 설명할 때 초자연적 요인을 검토한다고 해서 창조주 하나님의 지혜나 섭리를 비난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그렇게 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일상적 사건에서 덜 활동하신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과학은 두 가지 연구 맥락을 모두 허용하도록 정의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과학은 우리 주변 세계의 특징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규칙성을 찾는 동시에 인과관계를 설명하려 한다. 인과적 연쇄를 설명할 때는 관련된 모든 요인을 고려할 수 있다.” 기독교인은 초자연적 요인이 관련되는 맥락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같은 사건은 자연적 요인만으로 설명하는 것이 합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153]. 과학이 이와 같이 이루어진다면 신앙의 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과학은 형이상학적 기초로서 기독교의 창조와 섭리 교리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므로 과학을 자연주의와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8. 조화 (Harmonization) 두 기록의 조화를 찾는다는 것은 겉으로는 서로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두 기록이 일치하도록 하나 또는 둘 모두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조정하는 방법을 찾는다는 뜻입니다. 이 작업은 두 출처의 자료가 참되지만, 그 자료에 대한 우리의 해석은 조정이 필요할 수 있다는 전제에 기초합니다. 예를 들어 복음서 기록을 조화시키기 위해 한 저자는 시간 순서대로 사건을 기록하고 다른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가정할 수 있습니다. 또는 한 저자가 다른 저자보다 더 많은 세부사항을 기록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의 연대와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연구 등 외부 자료에서 얻은 연대를 조정하는 것도 정당한 작업입니다. 히브리 왕들의 연대에서 생기는 겉보기의 어려움을 공동 통치, 즉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통치하는 관행으로 설명하는 것이 한 예입니다. 어떤 기록은 공동 통치가 시작된 때부터 왕의 재위 기간을 계산하고, 다른 기록은 아버지가 죽은 때부터 계산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조화에는 성경 본문의 표면에 바로 드러나지 않는 해석이 필요합니다. 카일(Keil)의 오래된 주석 같은 자료에서는 이런 해석을 찾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이 설명 체계 전체가 옳은지는 별도의 문제이며,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러한 시도가 정당한 연구라는 것입니다. 반면 성경이 시공간 세계에 관해 주장할 권리를 가진다는 점을 주저 없이 인정해야 합니다. 물론 각 본문에서 사용된 언어의 종류는 개별적으로 고려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인종 간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여러 인간 유형이 각각 따로 창조되었거나 진화했다고 보는 다원발생설이 제안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학은 모든 인류가 아담으로부터 육체적으로 유래했다는 인류의 단일성을 고백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인간이 동일한 조상 부부에게서 유래했다는 단일기원설을 선호합니다[154]. 이 사례는 해석의 재검토가 양방향으로 이루어짐을 보여 줍니다. 때로는 자연 세계에 대한 해석을 수정하거나 거부해야 하고, 때로는 성경 본문에 대한 해석을 조정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삼위일체, 세계의 피조성, 예수님의 성육신과 부활 같은 핵심 기독교 교리를 수정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떤 조건에서 과학적 결과와의 조화가 성경 본문 해석에 영향을 주도록 허용할 수 있는가? 이는 여러 요인에 달려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과학 분야가 그 결과를 제시했는지가 중요합니다. 앞서 제시한 과학의 정의에 따르면 고고학도 과학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공동 통치라는 설명은 고고학적 결과를 고려하여 성경 본문을 이해하려는 시도입니다. 반면 자연주의적 진화론과 성경 해석을 조화시키려 해서는 안 됩니다. 그 이론은 성경의 세계관과 반대되는 세계관에 의존할 뿐 아니라, 자료를 그 자료가 뒷받침하지 않는 틀 안에 억지로 끼워 넣기 때문입니다. 조화의 적절성은 기독교 신앙과 반대되는 선입견이 과학 이론에 얼마나 스며들었는지에도 달려 있습니다. 자연주의적 진화론뿐 아니라 물질주의적 인간론을 전제하는 일부 인지과학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어떤 분야의 연구자 일부가 그런 전제를 사용한다고 해서 그 분야의 모든 연구자나 모든 이론이 신앙과 반대된다고 결론 내려서는 안 됩니다. 한 학문 분야에 자연주의적 연구자가 있다고 해서 모든 과학이 신앙에 적대적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각각의 경우를 개별적으로 검토해야 합니다. 또 다른 요인은 과학적 결과가 다루는 관심사가 성경 본문의 저자와 청중이 관심을 가졌던 것과 같은지 여부입니다. 중세에는 프톨레마이오스 우주론과 성경 본문이 쉽게 조화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 조화에 따르면 우주론이 폐기될 경우 성경도 틀린 것이 됩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구약학자는 시편 93:1, 96:10, 104:5 같은 본문이 물리적 우주론을 다루려는 것이 아니었다고 인정합니다. 애초에 이 본문들을 특정 우주론을 지지하는 데 사용하는 것은 주해적으로 타당하지 않았습니다. 이 조화 시도는 해당 성경 본문을 받은 사람들에게 무엇이 관련 있었는지 묻지 않았으며, 성경의 언어가 현상학적이고 일상적인 언어라는 점도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특정 과학 이론에 성경 해석을 결부시키면 그 이론이 크게 수정되거나 폐기될 때 우리의 해석이 역사적 호기심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반면 경험에 근거한 일부 결과는 오랜 시간 동안 유지될 수 있습니다.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조차 어느 결과가 지속될지 모른다면 비전문가인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가장 좋은 보호책은 성경 본문이 다루는 범위와 그 본문이 사용하는 언어의 종류를 염두에 두는 것입니다. 따라서 조화에 관해서는 “주의하라”는 말 외에 일괄적인 결론을 내릴 수 없습니다. 여러 요인을 고려할 때 조화가 성경의 옳음을 ‘증명한다’고 과장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특정한 상황에서는 조화가 개연성 있음을 보여 주어 상대방이 성경이 틀렸다고 ‘증명했다’고 주장하지 못하게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주해의 결과와 과학의 잠정적 결론을 통합하려는 시도를 처음부터 배척해서도 안 됩니다. 이러한 고려에 따르면, 예를 들어 ‘홍수 지질학’을 연구 시작 전부터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이 경우에도 핵심 질문은 성경과 암석에 대한 해석이 타당한가 하는 것입니다. 또한 충분히 검토한 뒤 홍수 지질학을 거부하는 사람이 반드시 노아 홍수의 역사성이나 보편성까지 거부하는 것은 아닙니다.
--- [141] “Bluspels and Flalansferes,” Selected Literary Essays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69), 263쪽. [142] The Doctrine of God (Baker, 1977), 91–92쪽. [143] 일부 형태의 ‘홍수 지질학’도 반드시 젊은 지구를 전제하지는 않는다. David Livingstone, Darwin’s Forgotten Defenders (Eerdmans, 1987), 14쪽과 비교하라. [144] 예를 들어 Walt Brown, In the Beginning (Center for Scientific Creation, 1995), 130쪽은 실질적 동일과정설을 염두에 두고 동일과정설을 비판한다. 그는 또한 “동일과정설은 전 지구적 홍수를 추방하기 위해 고안되었다”고 말한다. [145] Davis Young, Christianity and the Age of the Earth (Zondervan, 1982), 135–148쪽. 141–142쪽의 절 제목은 “현대 지질학은 실질적 동일과정설을 거부한다”이다. Livingstone, Darwin’s Forgotten Defenders, 14, 42–44쪽도 비교하라. [146] Michael Denton, Evolution: A Theory in Crisis (Adler & Adler, 1986), 69–77쪽 참조. 해당 장의 제목은 “다윈에서 교리로”이다. [147] 원문에 제시된 웹 주소: http://www.nabt.org/evolution.htm [148] Charles Thaxton, Walter Bradley, Roger Olson, The Mystery of Life’s Origin (Philosophical Library, 1984), 12쪽에서 인용. [149] 원문에 제시된 웹 주소: http://www.nsta.org/handbook/evolve.htm [150] 같은 자료. [151] 같은 자료. [152] 같은 자료. [153] 개혁주의 기독교인들은 불신자가 이 문제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리라 기대해야 하는지, 그리고 신자와 불신자가 함께 받아들일 수 있는 ‘공적’ 과학 정의가 존재하는지에 관해 의견이 다를 수 있다. 공적 정의를 인정하는 이들도 자연적 설명을 제시할 수 없는 공백이 있다는 사실을 불신자가 정직하게 인정해야 한다고 요구할 것이다. [154] Charles Hodge, Systematic Theology, 제2권 77–91쪽에서 이와 같은 사례를 비교하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