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 문학적 틀 해석(Framework Interpretation) 개요 문학적 틀 해석에는 여러 형태가 있습니다. 여기서는 PCA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는 메러디스 G. 클라인(Meredith G. Kline)과 마크 D. 푸타토(Mark D. Futato)의 견해를 다룹니다[96]. 창세기 1:1–2:3에 관하여 클라인은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주해의 결과, 창조 주간의 구성 자체는 시적 비유이며, 창조 역사의 여러 장면은 여섯 노동일이라는 틀 안에 배열되어 있다. 이 장면들은 연대기적 순서가 아니라 주제별 순서로 제시된다. 단순한 묘사와 시적 비유를 확정적으로 개념화된 내용과 구별할 때, 여기서도 언제나 그렇듯 궁극적인 지침은 성경의 나머지 부분과 비교하는 것이다[97]. 다시 말해 문학적 틀 해석의 독특한 특징은 각각의 날 자체가 아니라 ‘한 주간’ 전체를 은유로 이해한다는 데 있습니다[98]. 모세는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서술하기 위해 한 주간이라는 은유를 사용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창조 명령, 곧 말씀으로 이루신 창조 행위는 실제 역사적 사건이지만, 정확히 얼마나 시간이 걸렸는지는 본문에 명시되지 않았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왜 한 주간이라는 틀을 사용했을까? 모세는 아담에게 하나님을 본받아 일하고,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라는 약속을 바라보도록 부르신 내용을 이스라엘에게 보여 주려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간은 이스라엘의 주간과 유사한 모형입니다. 창조 사건들은 세 날씩 두 묶음으로 배열됩니다. 첫째 날부터 셋째 날까지는 창조된 영역들(왕국들)을 다루고, 넷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는 그 영역들을 다스릴 존재들(왕들)을 다룹니다. 아담은 땅의 왕이며 하나님은 창조의 왕이십니다[99]. 이 입장을 뒷받침하는 주요 논거는 두 가지입니다. 1. 창세기 1장의 순서는 창세기 2:5–6과 조화시키기 어렵습니다. 해당 본문은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라고 말합니다. 문학적 틀 해석에 따르면 이 구절은 창조의 엿새 동안 식물을 보존하신 방식이 기적이 아니라 물과 같은 통상적인 이차적 원인에 의한 것이었음을 전제합니다. 성경이 전제하는 내용도 영감된 의미의 일부입니다[100]. 비와 경작자가 없으면 하나님께서는 식물을 창조하지 않으셨을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5절은 창조 기간의 보존 방식이 이스라엘 백성이 알고 있는 현재의 자연적 보존 방식과 같았다고 전제합니다[101]. 그러나 통상적인 보존 방식은 144시간에 불과한 한 주간과 쉽게 조화되지 않습니다. 창세기 1장이 엄격한 시간 순서대로 진행되었다면, 창세기 2:5의 상황은 셋째 날에 해당해야 합니다. 셋째 날 이전에는 마른 땅이 존재하지 않았고, 셋째 날이 끝날 때에는 풍성한 식물이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2:5의 상황에서는 식물이 자라기에는 너무 건조했습니다. 전날인 둘째 날까지 물에 잠겨 있던 땅이 몇 시간 만에 마를 수는 없으며, 특히 넷째 날까지 태양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비나 사람이나 태양 없이도 식물을 보존하실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2:5는 식물의 창조가 지연된 이유를 그렇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물, 곧 이차적인 보존 수단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의 여섯 날은 연대기적 순서가 아니라 주제별 배열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학적 틀 해석은 그 주간이 얼마나 길었는지 규정하지는 않지만, 144시간보다는 길었다고 주장합니다. 2. 둘째로, 하나님께서 통상적인 섭리 방식으로 일하셨고, 발광체가 없는 빛(첫째 날)에서 발광체가 있는 상태(넷째 날)로의 변화는 통상적인 섭리 방식으로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에, 창세기 1장의 여섯 날은 시간 순서가 아니라 주제별 배열이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푸타토의 문학적 틀 해석은 창세기 1장과 2장이 모두 주제별로 구성되었다고 주장합니다. 모세는 기원전 제2천년기에 가나안 땅 변두리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을 교훈하기 위해 글을 썼습니다. 창세기 1장의 기본 메시지는 출애굽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하늘과 땅의 창조주이시며 바알이 창조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주권적인 말씀으로 만물을 존재하게 하셨고, 모든 피조물은 전적으로 그분께 의존합니다. 여호와께서는 비와 태양, 달과 별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시므로, 그것들은 숭배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문학적 틀 해석에도 여러 변형이 있습니다. 클라인은 자신의 초기 틀 해석을 발전시켜 최근에는 ‘두 층위의 우주론(two-register cosmology)’을 추가했습니다[102]. 브루스 월트키(Bruce Waltke)는 이 본문의 문학적 장르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이 본문은 창조를 문학적·예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여기에 그 목적을 덧붙이면, 혼돈을 질서 있는 우주로 바꾸신 창조주 안에 언약 백성의 예배와 삶의 근거를 두고, 하나님의 창조 질서 안에 그들의 윤리적 삶의 근거를 두려는 것이다. 앙리 블로셔(Henri Blocher)는 기본적으로 클라인의 견해를 따릅니다. 고든 J. 웬햄(Gordon J. Wenham)은 본문이 주장하는 역사성에 관해 상대적으로 명확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클라우스 베스터만(Claus Westermann)의 경우에는 고등비평의 전제에 이끌리는 다른 영역으로 넘어가게 됩니다[103]. 문학적 틀 해석과 다른 해석들의 비교 클라인과 푸타토가 제시하는 문학적 틀 해석은 달력상의 날 해석, 날-시대 해석, 유비적 날 해석과 여러 결론을 공유합니다. 이어지는 비교에서는 이러한 공통점과 차이점을 구분해 살펴봅니다. 문학적 틀 해석과 다른 해석들의 비교 클라인과 푸타토가 제시하는 문학적 틀 해석은 달력상의 날 해석, 날-시대 해석, 유비적 날 해석과 여러 결론을 공유합니다. 1. 창세기 1장은 영감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 계시라고 가르칩니다. 무로부터의 창조, 아담과 하와의 특별 창조, 인류의 언약적 머리로서의 아담, 그리고 죄의 결과로써의 죽음과 저주를 가르칩니다. 2. 아담의 역사성을 인정하며, 그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유일한 존재라는 점과 인류의 언약적 머리라는 사실을 확언합니다[104]. 3. 달력상의 날 해석과 마찬가지로, ‘욤(yôm)’, 곧 ‘날’이라는 말이 통상적인 하루를 가리킨다고 이해합니다. 4. 유비적 날 해석과 마찬가지로, 창조의 날들은 인간의 일과 쉼을 위한 본보기를 제시하도록 구성되었다고 봅니다. 또한 창세기 1장은 창조 주간의 길이가 얼마인지를 전달하려는 본문이 아니라고 봅니다. 5. 달력상의 날 해석과는 달리 창조 기간의 길이를 비유적으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날-시대 해석과 유사합니다. 그러나 문학적 틀 해석은 ‘날’을 긴 시간의 기간으로 이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날-시대 해석과 다릅니다. 또한 모세가 창조 역사를 시간 순서대로 서술하려 했다는 견해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달력상의 날, 유비적 날, 날-시대 해석과 구별됩니다. 평가: 강점 1. 문학적 틀 해석은 창세기 2장이라는 직접적인 문맥에 비추어 창세기 1장을 해석합니다[105]. 창세기 1장과 2장을 구체적이고 문맥적으로 조화시키려 합니다. 고대 근동의 독자들이 실제로 이해했을 의미에 주의를 기울이려는 접근이며, 이는 특히 본문의 문학적 특징을 강조하는 푸타토의 견해에서 두드러집니다[106]. 창세기의 독자는 고대 이스라엘이었습니다. 모세가 이교 신앙에 도전하려 했다면, 그의 비판의 화살은 현대의 자연주의적 천문학·생물학·지질학이 아니라 고대 바알 종교를 겨냥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갈 때 언약 백성을 굳건하게 하려고 기록했습니다. 주석적 결론에 차이가 있고 은유가 산문보다 묘사상 덜 정밀하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창세기 1장의 일차적 관심은 창조의 시점과 메커니즘에 관한 전문적인 과학 설명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창조 주간이 단순한 장식에 불과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언약에 순종하라는 부르심입니다. 2. 이 견해는 창조의 시점이나 기간보다는 하나님의 능력 있는 말씀과 창조 질서를 강조하는 신약성경의 가르침과 충분히 양립할 수 있습니다. 특히 히브리서 4:4–6과도 조화를 이룹니다. 이 본문은 창세기 2:2의 일곱째 날, 곧 하나님의 창조 안식을 교회의 궁극적인 소망으로 제시합니다. (부록 「창세기 1–3장의 역사성에 대한 신약성경의 견해」 참조.) 3. 문학적 틀 해석은 언약, 하나님의 형상, 안식일과 같은 성경신학적 주제를 모세가 제시했다는 점을 부각하므로 신학적으로 풍부합니다. 날들의 문학적 구성은 창조의 주권적 설계자이시며 만물의 목적이 되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지혜를 드러냅니다. 4. 과학 이론과 신학의 관계에 관해서 이 견해는 성경의 한계 안에서 지구와 우주의 연대에 관한 일반 계시의 연구를 허용합니다[107]. 그 한계에는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 아담과 하와가 유전적으로 유일하며 인류의 부모로 특별히 창조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아담의 타락이 하나님의 선한 창조 세계에 저주를 가져왔다는 사실 등이 포함됩니다. 이 견해는 진화적 기원과 성경의 가르침에 모순되는 진화 철학을 거부합니다[108]. 문학적 틀 해석에 대한 반론 1. 이 견해는 창세기 1장을 비역사적인 본문으로 만든다는 비판을 강하게 받아 왔습니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비판이 제기됩니다. 복음주의 문학적 틀 신학자들은 창세기의 기록이 사실에 근거한 역사적 서술이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확언하는 예술적 표현이자 신적 은유이며, 창조 과정의 메커니즘이나 시간적 틀에 대해서는 알려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109]. 이 비판은 중대한 문제를 제기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창세기 1–3장의 역사성에 기초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학적 틀 해석의 대표자인 메러디스 클라인은 정반대의 입장을 명시적으로 확언합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창세기 1–11장은 신화가 아니라 진정한 역사 기록이다. … 이 장들의 내용은 다른 성경 본문에서 영감받은 저자들에 의해, 창세기 12–50장이나 열왕기 또는 복음서가 역사로 이해되는 것과 동일한 의미에서 역사로 해석되었다”[110]. 이 역사성의 확언은 로마 가톨릭 학자 J. A. 피츠마이어가 로마서 5:12에 대해 “바울은 창세기의 상징적 아담을 역사적 인물로 바꾸어 놓았다”고 말한 것과 비교하면 더욱 분명해집니다[111]. 따라서 문학적 틀 해석을 창세기 1:1–2:3을 신화나 비유담 또는 알레고리로 보는 주장과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이 해석은 하나님의 명령으로 이루어진 초자연적 기원 사건과 아담과 하와의 특별 창조를 분명하게 가르친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철학적·과학적 전제를 성경과 절충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주석적 해석입니다. 이 견해를 따르는 사람들도 하나님께서 세계를 144시간 안에 창조하실 수 있었다는 점에는 동의합니다. 성경의 무오성을 믿는다면, 자연주의적·고등비평적·진화론적 전제에 동기 부여를 받아 문학적 틀 해석을 주장하는 사람을 정통 신앙의 범주에 포함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전제는 이 해석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남용하는 것입니다[112]. 역사성을 인정하면서 시간적 순서를 부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가 서술을 기록할 때 역사 서술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연대기적 순서로 보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역사성을 판단할 때 흔히 ‘언제, 어떻게 일어났는가?’를 묻습니다. 시간 표지가 비유적이라고 하면서 동시에 역사가 반쯤 비유적인 형태로 서술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표면상 모순처럼 보입니다. 이 점 때문에 사건의 역사성을 부정하거나 자연주의적 기원 이론을 받아들이려는 사람들이 이 해석을 악용할 위험이 있습니다. 이는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문제입니다. 2. 이 입장은 창세기 2:5–6을 해석하면서 창조 주간 동안 기적적인 보존이 전혀 없었다고 보는 주해에 의존합니다. 초자연적인 보존도 있었다면 창세기 2:5–6은 창세기 1장을 비연대기적으로 해석하도록 요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창세기 2:5–6은 자연적인 보존만을 명백하게 전제하여 창세기 1장의 한 주간이 은유라고 결론 내리게 하는가? 창세기 2:5에 묘사된 상황 이전에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으로 땅을 마르게 하실 수는 없었는가? 만일 그러셨다면, 클라인의 주장처럼 창세기 2:5 하반절에 제시된 이유가 무의미해지는가? 3. 출애굽기 20:11과 창세기 1:1–2:3의 관계도 문제를 제기합니다. 출애굽기 20:11은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에는 기간을 나타내는 대격(accusative of duration)이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비판자들은 출애굽기 20:11이 창조 사역의 기간에 대한 영감된 해석을 제공한다고 주장합니다. 많은 이들에게 이것은 결정적인 논거입니다. 문학적 틀 해석을 지지하는 이들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간 사용의 본보기를 인간이 따르기 위해서는 여섯과 하나라는 패턴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답합니다. 즉, 넷째 계명에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안식(육체적 쉼을 포함함)은 하나님의 일곱째 날 안식과 유비 관계에 있습니다. 일곱째 날에 하나님께서 새롭게 하셨다는 사실(출 31:17 참조)은 이스라엘이 육체적으로 쉼을 누리는 신학적 근거가 됩니다. 4. 문학적 틀 해석은 ‘창세기 1장의 문학 장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낳습니다. 이 본문은 해석하기 어려운 혼합 형식을 띠는 것으로 보입니다[113]. 은유와 직접적인 산문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지지자들은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은유를 사용할 때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특별히 더 어려운 문제는 아니라고 답합니다. 예를 들어 이사야 48:13은 “내 손이 땅의 기초를 놓았고 내 오른손이 하늘을 폈나니”라고 말합니다. ‘손’, ‘기초’, ‘펴다’라는 은유는 이해에 어려움을 주지 않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본문의 역사적 주장을 위협하지 않으며 성경의 명료성을 훼손하지도 않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도 다른 성경 본문과 마찬가지로, 좁은 문맥과 넓은 문맥 모두에서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는 원리가 결정적인 기준이 됩니다. 5. 이 견해는 복잡하며, 때로는 부적절하거나 논쟁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표현되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 독자가 실제 역사성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창조 주간을 은유로 이해할 수 있었는지 정당하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6. 문학적 틀 해석은 여러 선택지 가운데 가장 오해 받기 쉬운 견해입니다. 지지자들은 이 견해가 복잡하고, 때로 서투르게 표현되었으며, 모든 주해상의 질문에 답하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오늘날처럼 논쟁이 격렬한 환경에서는 목회적 지혜와 세심한 배려를 가지고 다루어야 합니다.
--- [97] “Genesis,” 82쪽. [98] 따라서 히브리어 ‘욤’(yôm)은 통상적인 의미로 이해된다. [99] “Genesis,” 82–83쪽. [100]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장 6항: “하나님의 모든 뜻은 성경에 명시적으로 기록되어 있거나, 선하고 필연적인 추론으로 성경에서 도출될 수 있다.” [101]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5장 3항: “하나님께서는 통상적인 섭리에서 수단을 사용하시지만, 수단 없이, 수단을 초월하여, 수단에 반하여 일하실 자유도 있으시다.” 정상적인 보존도 하나님의 임재와 활동을 전제한다. Donald Macleod는 Behold Your God (Tain: Christian Focus, 1990), 50쪽에서 모든 제2원인은 하나님께 능력을 빚지고 있으며, 전체 체계는 하나님의 내주하시는 능력 때문에만 효력을 발휘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비가 내리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다. [101] (계속) 여기서 제2원인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은 보존이지, 피조물을 존재하게 부르신 창조의 말씀 자체가 아니다. Kline은 “초자연적인 기원의 행위들이 창조 과정을 시작하고 중요한 지점마다 개입했다”고 쓴다. “Space,” 13쪽. [102] “Space.” 이 주제는 별도의 분석이 필요하며 이 보고서의 범위를 벗어난다. [103] Bruce K. Waltke, “The Literary Genre of Genesis, Chapter One,” Crux 27 (1991), 9쪽; H. Blocher, In the Beginning (InterVarsity, 1984); M. W. Poole와 G. J. Wenham, Creation or Evolution: A False Antithesis? (Oxford: Latimer House, 1987); Claus Westermann, Genesis 1–11: A Commentary (Minneapolis: Augsburg, 1984). 보고서는 Westermann의 견해를 따르는 PCA 목회 후보자를 만나지 못한 점을 다행스럽게 여긴다고 덧붙인다. [104] Kline은 창세기 2:7에 관해, 생명을 부여받은 피조물은 이전에 살아 있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행위로 비로소 살아 있는 존재가 되었다고 쓴다(고린도전서 15:45 참조). “Genesis,” 83쪽. [105] 모든 해석자는 창세기 1장과 2장의 자료 배열 차이를 설명해야 한다고 인정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장 9항은 성경 해석의 무오한 규칙은 성경 자체이며, 어떤 구절의 참되고 온전한 의미는 더 분명하게 말하는 다른 구절을 통해 찾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틀 해석은 ‘저녁’, ‘아침’, ‘첫째 날’ 등의 시간 표지를 모세의 구성에서 주제적 기능을 하는 표현으로 설명한다. 주제별 배열과 반복 서술은 창세기 서술과 양립할 수 있다. [106] “Because,” 20쪽. [107] 틀 해석 지지자 다수가 오래된 지구를 주장하지만, 틀 해석 자체는 지구의 나이에 관해 입장을 정하지 않는다. 젊은 지구와 오래된 지구 어느 쪽과도 양립할 수 있다. 특별계시인 성경은 일반계시 연구의 결론을 인도하고 제한한다. [108] Kline은 바울이 여자의 기원에 관한 기록을 명백한 역사로 이해했다고 쓴다. 창세기 2:7을 이렇게 해석하면 아담을 산출한 창조 행위가 인간 이하 단계에서 진화한 선행 생명 과정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는 이론적 재구성에서 벗어나게 된다. “Genesis,” 84쪽. [109] The Counsel of Chalcedon, 1998년 11월호, 5쪽. [110] “Genesis,” 79쪽. [111] Romans: A New Translation with Introduction and Commentary, Anchor Bible 제33권(New York: Doubleday, 1993), 408쪽. [112] 장로로서 우리는 어떤 입장을 취하는 사람의 동기를 살펴볼 책임이 있다. 그러나 의심이 있더라도 마음의 동기를 확증할 수는 없다. 사랑은 그 사람이 자신의 입장을 설명한 말을 믿고 받아들이도록 요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