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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게시판

제목미국 PCA_창조연구위원회 보고서_달력상의 날 해석(Calendar-Day Interpretation)-24시간 날 해석2026-10-15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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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창세기 1–3장과 창조의 날들에 관한 주요 해석

창조 기사에 대한 올바른 해석을 둘러싼 현재의 논의에서 어려운 점 가운데 하나는 여러 견해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입니다. 달력상의 날 견해와 날-시대 견해를 제외하면 다른 견해들은 종종 오해를 받습니다. 지지자와 반대자 모두 일부 견해의 미묘한 차이를 설명하고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 결과 혼란과 의심이 생깁니다.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 창조연구위원회는 PCA 안에서 대표적으로 나타나는 주요 견해들과 잘 알려지지 않은 몇몇 견해를 간략히 설명하기로 했습니다. 각 견해의 지지자들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서술하되, 그 견해에 대한 비판적 평가를 미리 배제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A. 달력상의 날 해석(Calendar-Day Interpretation)

입장의 정의

성경은 하나님께서 무에서 만물을 엿새 동안 창조하셨다고 가르치며, 모세가 말한 그 엿새는 달력상의 여섯 날을 의미한다. 이 견해는 흔히 문자적 견해, 전통적 견해 또는 24시간 견해라고 불린다.

입장의 설명

달력상의 날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창조 교리의 중요성에 관한 바빙크의 진술을 전적으로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어떠한 존재도 없으며, 창조주는 오직 계시를 통해서만 참되게 알려질 수 있다.”[27] 바빙크는 다른 곳에서 “창조주와 피조물의 구별을 확증하는 창조 교리는 참된 종교의 출발점이다”라고 말합니다.[28] 또한 “따라서 창조 교리는 지구의 나이나 인류의 진화적 기원에 관한 문제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질문들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말이다”라고 전합니다.[29]

창세기 1장에서 배워야 할 중요한 점은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사실이지, 창조의 세부 사항이 아니라는 주장이 자주 제기됩니다. 그러나 달력상의 날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창조의 날들의 길이도 ‘참되고 정확한’ 세부 사항이며, 따라서 창조 기사에서 필수적인 부분이라고 확신합니다.

루터교 학자 H. C. 로이폴드는 이 문제를 매우 분명하게 지적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둘 중 하나’가 아니라 ‘둘 다’라는 것입니다.

“세부 사항은 참되고 정확하며 필수적이다. 모든 부분에서 진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기사가 전달하는 넓고 기본적인 진리 또한 무한히 중요하며 그 자체로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진리다. 성경이 가르치는 영감에 대한 믿음은 다른 가능성을 허용하지 않는다.”[30]

시드 다이어 박사의 말도 창세기 1장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줍니다.

“창세기 1장의 문자적 해석을 포기하면 그 계시적 의미가 축소된다. 문학적 틀 가설은 이 장 전체를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질서 있게 창조하셨다는 일반적 진술로 축소한다. 하나님께서 실제로 어떻게 창조하셨는지는 답하지 않은 채 남는다. 결국 너무 적은 내용을 말하면서도 지나치게 많은 말을 한 셈이 된다. 반면 문자적 해석은 이 장 전체가 지닌 계시적 의미를 온전히 받아들인다. 창세기 1장을 하나님을 창조의 저자로 묘사하는 글로 보는 대신, 말씀으로 만물을 존재하게 하신 하나님을 창조의 주체로 선포하는 글로 본다.”[31]

따라서 의도가 아무리 선하더라도 교회가 창조 기사의 명백한 의미를 받아들이는 데서 물러서는 것은 복음 선포의 신뢰성을 약화하는 문을 여는 일이라고 우리는 봅니다.

달력상의 날 견해는 간단히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 견해는 창세기 1장을 역사적·연대기적 성격의 기록으로 받아들이며, 창조 주간은 24시간으로 이루어진 여섯 날과 그 뒤의 24시간 안식일로 구성된다고 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성숙한 성인으로 창조되었듯이[32], 나머지 창조 세계도 창조주에게서 완성된 형태로 나왔습니다. 동산에는 다 자란 나무와 동물들이 있었고, 아담은 동물들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이 견해의 지지자들은 이것이 창조 기사를 자연스럽게 읽는 방식이며, 유대교와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널리 받아들여진 해석이라고 믿습니다.

이 견해는 창조 기사를 역사적 서술로 받아들입니다. 창세기 1장이 시적 성격을 띤다는 일부 복음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해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고(故) 에드워드 J. 영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창세기의 명백한 사실 진술을 피하기 위해 일부 복음주의자들은 창세기 앞부분이 시나 신화라고 말한다. 그들이 뜻하는 바는 그 부분을 직접적인 사건 기록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으며, 그렇게 보면 어려움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 그들은 그런 견해를 채택하면 현대 과학과 관련된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말한다. … 창세기는 시가 아니다. 성경에는 시편 104편과 욥기의 일부 장들처럼 창조를 시적으로 묘사하는 본문이 있으며, 그것들은 창세기 1장과 완전히 다르다. 히브리 시에는 특정한 특징들이 있지만 창세기 1장에는 그런 특징들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이 시라는 주장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창세기 1–3장의 문학적 구조는 달력상의 날 해석을 뒷받침합니다. 전형적인 히브리 서술 방식에 따라 창세기 1:1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창조 전체를 소개하는 포괄적인 진술입니다. 더글러스 켈리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창세기의 저자는 이보다 더 포괄적인 진술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늘과 땅’은 은하와 성운, 태양계에서부터 우주 공간의 가장 먼 곳에 있는 것들과 지구상의 가장 작은 모래알이나 세균에 이르기까지 존재하는 모든 것을 뜻한다. 절대적으로 모든 것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34]

이처럼 창조라는 주제를 소개한 뒤, 나머지 장은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 특히 땅을 어떻게 창조하셨는지를 보다 구체적으로 다룹니다. 이 전체 기사는 창세기 나머지 부분과 성경 전체의 서론 역할을 합니다. 바로 다음 구절인 창세기 2:4는 창세기의 구조에서 중요합니다. 히브리어 본문에서 이 구절은 큰길의 방향을 알려 주는 표지판처럼 앞으로 이어질 책의 내용을 가리킵니다. “이것이 … 내력이라”라는 표현(히브리어 *톨레도트*)은 창세기의 두 번째 부분이 여기서 시작됨을 알려 주며, 초점은 창조 전체에서 선택된 한 사람과 그의 후손으로 크게 좁혀집니다.

따라서 창세기 2장은 창조에 관한 두 번째 별도 기사가 아니라 인간의 창조, 에덴동산, 여자의 창조, 시험과 타락에 관한 세부 사항을 제시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3장에서는 성경 나머지 부분의 목적, 곧 죄인을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달력상의 날 견해는 창세기 1장의 표현을 그 문맥에 따라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창조 기사에서 ‘날’(히브리어 *욤*)이라는 말은 세 가지 방식으로 사용됩니다. 각각의 경우 문맥이 명확하여 어떤 의미인지 의문의 여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5절은 빛을 낮이라 하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며, 같은 절에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또한 창조 주간 전체를 창조주께서 행하신 ‘날’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창 2:4). 이 각각의 경우 ‘날’의 의미는 문맥상 분명하다고 봅니다.

창조의 날들의 길이는 성경의 다른 곳에 나오는 ‘날’(*욤*)의 길이와 같다는 것이 이 견해의 주장입니다. 성경에서 ‘첫째 날’, ‘둘째 날’처럼 서수가 붙은 ‘날’이라는 표현은 언제나 일반적인 태양일을 의미한다는 사실이 그 근거로 제시됩니다.

하나님께서 빛을 창조하고 낮과 밤을 나누신 뒤 첫째 날의 일을 마치셨습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이와 같은 공식은 창조의 여섯 날 각각의 끝에 반복됩니다. 따라서 첫째 날을 포함한 각 날의 길이가 같았다는 것이 명백하다고 이 견해는 주장합니다.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낮과 밤, 곧 빛의 시간과 어둠의 시간이 순환적으로 이어졌습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공식은 창조 주간의 날들을 연결하는 표현이므로, 여덟째 날에 관한 설명이 없듯이 일곱째 날 뒤에는 반복되지 않습니다.

헨리 모리스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창세기 첫 장에서는 각 날의 일이 끝날 때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째 날[또는 둘째 날 등]이니라’라는 공식이 사용된다. 따라서 각 ‘날’에는 분명한 경계가 있었고, 여러 날이 연속해서 이어지는 한 날이었다. 구약의 다른 기록에서는 이 두 조건이 문자적인 날을 뜻하지 않는 경우에 함께 나타나지 않는다. 창세기 저자는 독자들이 자신의 기록에서 비문자적인 날이라는 생각을 끌어내지 못하도록 가능한 모든 방법을 사용한 것이다.”[36]

강점

1. 달력상의 날 견해는 창세기 1–3장을 처음 읽을 때 자연스럽게 도달하는 해석입니다. 각 단어에 가장 일반적이고 평이한 의미를 부여하며, 이는 저자가 많은 노력을 기울여 전달하려 한 의미입니다.[38] 오늘날의 기준으로 볼 때 정교한 지식이 부족했던 최초의 청중도 분명 이 기사를 그렇게 이해했을 것입니다. 본문과의 관계가 단순하고 직접적이므로 이 견해는 설명하거나 정당화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2. 달력상의 날 견해는 창세기 1–3장의 역사성을 의심하거나 불확실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3. 달력상의 날 견해는 출애굽기 20:11에 기록된 제4계명의 신학적 논리를 뒷받침하며, 그 계명에 의해 확인됩니다. 제4계명은 일과 쉼의 7일 주기를 확증합니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 2:27).

4. 달력상의 날 견해는 아담이 하나님의 창조의 절정이며, 모든 창조 세계를 대표하는 언약적 머리이자 청지기였다는 이해와 부합합니다. 또한 죽음은 형벌이며 타락 이후 창조 질서 안으로 들어왔음을 확언합니다(롬 5:12). 그러므로 인간의 죄와 그에 따른 하나님의 저주가 있기 전에는 아담이 다스리던 동물 세계에 죽음이 없었습니다(창 1:28; 2:21). 하나님은 뱀에게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 3:14). 하나님께서 “심히 좋았더라”고 선언하신 창조 세계는 “허무한 데 굴복”하게 되었지만, 이는 창조 세계 자체의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굴복하게 하신 이로 말미암은 것이며, 창조 세계도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에 이르게 될 소망을 품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음을 압니다(롬 8:20–22).

5. 달력상의 날 견해는 정경 이후 초기 주석가들(예: 바실리우스와 암브로시우스), 중세 스콜라 학자들(예: 토마스 아퀴나스와 롬바르두스), 종교개혁의 주요 개혁자들(예: 루터, 칼뱅, 베자), 청교도들(예: 에인스워스, 어셔, 에임스, 퍼킨스, 오언, 에드워즈)이 취한 견해였습니다.[39] 웨스트민스터 총회 신학자들 가운데 이 견해를 지지한 것으로 알려진 이들이 유일하며, 총회는 창조가 순간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견해(예: 아우구스티누스, 안셀무스, 콜렛)와 대조하여 이 입장을 확언했습니다.[40]

6. 달력상의 날 견해는 특별계시에 근거하며, 균일론적 지질학, 다윈주의적 진화론, 빅뱅 우주론, 심지어 창조과학을 포함하여 고대나 현대의 특정한 과학적 세계관에 빚을 지거나 의존하지 않습니다. 한 시대의 과학에 결부된 신학은 다음 시대에 과부가 됩니다.[41]

7. 창세기 1장의 기록은 무생물에서 생물로 논리적으로 전개되며, 마침내 창조의 초점인 인간을 절정으로 삼습니다. ‘날’(*욤*)에 서수가 붙는 것은 순서를 나타내는 표현이므로 이러한 전개를 뒷받침합니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 서수가 붙은 *욤*은 모두 일반적인 하루의 의미와 일치하며, 성경 외의 문헌에서도 그와 반대되는 사례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8. 달력상의 날 견해는 PCA의 남부 장로교 전통의 뿌리에 해당하는 인물들(예: 댑니, 손웰, 지라르도)의 견해이기도 합니다. 이들은 해외에서 온 시도들(예: 찰머스, 밀러), 북부의 동료 장로교인들(예: 하지, 워필드), 심지어 교회 내부의 인물들(예: 애드저)이 이 문제에 관한 교회의 입장을 넓히려는 시도에 강하게 저항했습니다. 이러한 역사는 지난 세기의 우드로 진화론 논쟁[42]과 1969년 미국 남장로교회(PCUS) 총회의 결정에 대한 계속교회 운동의 저항[43]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달력상의 날 견해를 지지하는 이들은 성경의 유비와 신앙의 규범에 비추어 사용한다는 조건 아래 창세기 기사의 구조와 언어를 분석하는 새로운 방법을 환영합니다. 본문에 담긴 주해적·신학적 복잡성을 충분히 고려하는 신중한 연구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본문의 진리성, 역사성, 연대기적 순서, 궁극적으로는 의미 자체를 의심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이 견해가 어떤 대안적 의미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맥과 본문의 표지들이 모두 해당 해석을 뒷받침합니다.

반론

1. 오늘날 지배적인 ‘과학적’ 시대정신 때문에 전통적 견해는 지적 탐구를 거부하는 입장으로 쉽게 왜곡되며, 지구중심설이나 평평한 지구를 주장하는 사람들과 같은 부류로 취급되기도 합니다.[44] 그러나 월트 브라운과 헨리 모리스 같은 학자들의 현대 저술이나 《창조연구학회 계간지》(Creation Research Society Quarterly)에 실린 여러 논문을 객관적으로 살펴보면 이러한 규정이 잘못되었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2. 어떤 이들은 넷째 날에 해와 달이 창조되었다는 사실이 첫째 날부터 셋째 날까지의 ‘날’을 달력상의 하루로 해석하는 데 결정적인 반론이 된다고 주장합니다. 즉 “첫 사흘의 성격이 어떠했든, 해가 없었으므로 보통의 태양일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고대 이교도 켈소스가 처음 제기한 이 주장은 모세가 우상 신화를 반박하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해와 달은 이집트인과 메소포타미아인 모두에게 숭배의 대상이었으므로, 모세는 그것들을 신적 존재가 아니라 창조주께서 만드신 피조물로 제시합니다.

보통의 하루라는 해석에 대한 이 반론은 대개 첫 사흘에 태양빛이 없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며, 태양빛을 대신할 수 있는 여러 광원을 제안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과 반박은 여러 이유에서 무익한 논쟁입니다.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그날들의 빛을 관찰한 존재가 하나님 외에는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 어둠과 빛이 다르지 않다고 말합니다(시 139:12). 그러므로 빛이 어떤 방식으로 비추었는지를 인간의 관찰 조건으로 제한할 이유가 없습니다.

태양이 창조되기 전의 빛에 관한 논쟁은 달력상의 날 견해를 지지하는 이들이 종종 비판받는 바로 그 약점, 곧 창조 기사를 기술적이고 기계론적인 용어로 이해하려는 태도를 드러냅니다. 일부 반론자들도 같은 오류를 범합니다. 이들은 대체 광원이 무엇이었는지를 염려하지만, 첫 사흘 동안 태양이 없었다는 사실은 단순히 빛의 대체 원천을 찾는 문제보다 자연주의적 설명에 훨씬 더 심각한 난제를 제기합니다.

빛에 관한 문제는 또 다른 면에서도 피상적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빛’이라고 부르며 당시 독자들도 그렇게 이해했을 것으로 보이는 것은 가시광선입니다. 그러나 가시광선은 전자기 스펙트럼 전체 가운데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 “빛”을 창조하셨을 때(창 1:3), 우주의 구성 요소들을 결속하고 서로 상호작용하게 하는 모든 종류의 파동 현상도 창조하셨다고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태양이 없는 ‘태양일’이라는 난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도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한 제안은 빛을 내는 천체들이 첫째 날 이미 창조되었고, 넷째 날에는 각자의 역할을 맡도록 ‘지정’되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 주장을 따르는 이들은 대개 넷째 날까지 어떤 구름층이 그 천체들을 가리고 있었다고 제안합니다. 그러나 이런 가정은 14–19절의 명백한 진술과 충돌할 뿐 아니라, 본문에 없는 설명을 덧붙이는 것입니다.

3. 어떤 이들은 이 견해가 “과학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며 하나님의 진실성을 훼손한다”고 주장합니다. 한편으로는 우주 기원에 관한 현재 과학계의 핵심적 결론을 무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구의 나이에 관한 일반계시의 증거가 오도하는 것처럼 보아야 한다고 요구한다는 이유에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특별계시의 빛 없이 인간이 일반계시를 정확히 해석할 수 있다는 가정에 근거합니다.

4. 한 비판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 견해는 현대의 세계관과 인생관, 특히 시간과 작동 방식에 대한 관심을 배경으로 본문을 읽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 창세기 1장의 정확한 형식과 내용이 먼저 이스라엘에게, 그리고 물론 오늘날 우리에게도 은혜의 방편이 되도록 하나님께서 정하셨다는 사실을 가린다. 당시 이스라엘은 오늘날과 매우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본문을 올바르게 해석하려면 계시가 역사 속에서 전개된 과정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이에 대해 우리는 이 기사가 역사적 기록이라면 그 안에는 시간적 순서와 작동 방식이 있었을 것이라고 답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유일한 질문은 하나님께서 그 시간적 순서 가운데 무엇을 계시하기로 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내용을 충분히 드러내셨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제안하는 유일한 ‘작동 방식’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만물을 존재하게 하셨고, 그 후에도 자신만 아시는 방식으로 그것들을 보존하신다는 것입니다. 앞의 제2항에서 설명했듯이, 여기에는 초자연적인 섭리의 행사가 포함되어야 했습니다.[49]

이스라엘의 세계관이 달랐다는 주장과 관련해서는, 기술적으로 원시적이었던 백성의 세계관이 20세기의 과학적·언어학적 도구를 요구하는 견해보다 성경 기록을 평이하게 읽는 방식에 훨씬 더 가까웠을 것이라고 봅니다. 또한 날-시대 견해처럼 긴 ‘날’들이 서로 겹친다는 기계론적 세부 설명에 의존하는 견해야말로 창세기에 제시된 단순한 그림보다는 오늘날 지배적인 과학적 패러다임에 더 가깝습니다.

5. 다음과 같은 반론도 제기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넷째 날에 광명체들을 창조하셔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셨다(창 1:14). 이 천체들은 인간이 날과 해를 구분할 수 있게 하는 일종의 기준이다. 처음 사흘의 시간을 특정하려는 시도는 창세기 1장이 해에게 부여한 날의 통치 역할을 무시한다(창 1:16). 그러므로 첫 사흘의 시간을 규정하는 데 신중해야 한다.”

이 반론은 허수아비 논증에 가까워 보입니다. 해가 첫 사흘에 이미 존재했다고 하더라도, 날과 해를 식별하려는 인간이 아직 없었으므로 그 기간에 해가 그 역할을 수행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우리 역시 첫 사흘이나 다른 날들의 시간을 임의로 만들어 내거나 본문에 강요하는 데는 신중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날들에 관해 말씀하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에는 주저함이 없습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해의 역할이 조금이라도 축소되는 것은 아닙니다.

6. 이와 비슷한 반론이 여럿 제기되어 왔습니다. 이들은 모두 창세기 1장의 기록과 2장 앞부분의 관계에 관한 것입니다. 창세기 2:5는 비가 내리지 않았다는 일반 섭리적 이유를 들어 들의 관목과 밭의 채소가 아직 없었다고 설명하므로, 달력상의 날 견해로는 창세기 1:1–2:3과 2:4–25의 기록을 조화시키기 어렵다는 주장입니다. 따라서 이 견해는 두 장에 나타나는 사건의 순서 차이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창세기 2:9은 하나님께서 땅에서 나무가 자라나게 하셨다고 말하지만, 앞 절은 하나님께서 동산을 ‘심으셨고’ 사람을 ‘지으셨다’고 말합니다(NIV). 1장의 동사 시제는 분명하지만, 2장의 동사들은 단순 과거 또는 과거완료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모호한 본문을 더 명확한 본문에 비추어 해석해야 한다는 원칙에 따르면 여기서는 과거완료의 의미가 적절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이해한다면 2장의 서술은 1장의 순서와 충돌하지 않습니다.

최초의 청중이 무엇을 이해했을지를 생각해 보면, 그들은 창세기 1장이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초자연적 창조를 기록하고 있음을 알았을 것이며, 창조의 절정인 인간을 위해 하나님께서 특별한 장소를 기적적으로 준비하셨다는 2장의 기록도 어려움 없이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창세기 2:4b–9은 식물이 인간 창조 이후에 형성되었다고 암시하는 것이 아니라, 에덴동산이 그 사건 이후에 조성되었다고 말할 뿐이다.”[52] 그들은 또한 2장의 기록이 1장의 창조 기사를 부정하거나 수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부 사항을 보충한다는 점을 이해했을 것입니다.

 

[25] Louis Berkhof,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 제4판(1941), 36쪽 이하.

[26] 같은 책, 37쪽. Warfield의 『계시와 영감』(Revelation and Inspiration), 6쪽을 인용한 것이다.

[27] 이 보고서 1쪽을 참조하라.

[28] Herman Bavinck, 『태초에: 창조신학의 기초』(In the Beginning, Foundations of Creation Theology), John Bolt 편집, John Vriend 번역(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99), 23쪽.

[29] 같은 책, 18쪽.

[30] H. C. Leupold, 『창세기 주석』(Exposition of Genesis)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50), 제1권, 105쪽.

[31] Sid Dyer, 「신약성경의 창조 교리」(“The New Testament Doctrine of Creation”), Joseph A. Pipa, Jr.와 David W. Hall 편, 『하나님은 엿새 동안 창조하셨는가?』(Did God Create in Six Days?) 수록(Taylors, SC: Southern Presbyterian Press 및 Oak Ridge, TN: The Covenant Foundation, 1999), 237쪽.

[32] Bavinck, 앞의 책, 249쪽을 참조하라.

[33] Edward J. Young, 『태초에: 창세기 1–3장과 성경의 권위』(In the Beginning: Genesis 1–3 and the Authority of Scripture) (Edinburgh: Banner of Truth Trust, 1976), 18–19쪽.

[34] Douglas F. Kelly, 『창조와 변화: 변화하는 과학적 패러다임에 비추어 본 창세기 1:1–2:4』(Creation and Change: Genesis 1.1–2.4 in the Light of Changing Scientific Paradigms) (Ross-shire: Christian Focus Publications, 1997), 45쪽.

[35] 같은 책, 46쪽.

[36] Henry M. Morris, 『창세기 기록: 시작에 관한 과학적·경건적 주석』(The Genesis Record: A Scientific and Devotional Commentary on the Book of Beginnings)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76), 55–56쪽.

[37] Hubert Thomas, 『신약성경에 언급된 창조(창세기 1–11장)』(Mentions de la Creation [Genèse 1–11] dans le Nouveau Testament) (Lausanne: Association Creation, Bible et Science, 1933). Douglas F. Kelly가 번역하고, 그의 『창조와 변화』(Creation and Change: Genesis 1.1–2.4 in the Light of Changing Scientific Paradigms) (Fearn-Tain: Mentor, 1997), 129–130쪽에서 인용했다.

[38] Douglas Kelly는 자유주의 학자 Marcus Dods의 다음 말을 인용한다. “예를 들어 이 장들에서 ‘날’이라는 단어가 24시간의 기간을 뜻하지 않는다면, 솔직한 해석자는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렇지 않으면 성경 해석은 희망이 없다.” 출처는 『해설자의 성경』(Expositor’s Bible) (Edinburgh: T. & T. Clark, 1888), 4쪽이며, Kelly의 앞의 책 50쪽에서 재인용되었다. Kelly는 또한 옥스퍼드 교수 James Barr가 최근 저서에서 전통적인 초자연적 기독교를 거부하는 근본주의 비판을 제시하면서도, 창세기 창조 기사의 ‘날’을 24시간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점에 관해서는 비슷한 주장을 했다고 말한다.

[39] “다른 견해는 엿새라는 표현을 포함하여 창조 서술의 문자적 의미를 고수한다. 이 견해는 터툴리안, 바실리우스, 닛사의 그레고리우스, 에프렘, 다마스쿠스의 요한이 따랐다. 이후 스콜라주의에서 거의 지배적인 견해가 되었으며, 로마 가톨릭 신학과 개신교 신학 모두에서 그러했다. 다만 아우구스티누스의 대안적 주해도 존중을 받으며 지속적으로 논의되었고 이단으로 낙인찍히지는 않았다.” Herman Bavinck, 『태초에: 창조신학의 기초』(In the Beginning: Foundations of Creation Theology) 영어판에서 인용.

[40] 물론 아우구스티누스 자신도 자신의 입장을 일관되게 유지하지 않았으며, 다른 이들에게 그 견해를 받아들이라고 강하게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가 보편적으로 존경받았다고 해서 그의 견해가 받아들여진 것도 아니다. 실제로 Bavinck의 다음 인용문들이 보여 주듯, 그 견해는 널리 거부되었다. 이것이 웨스트민스터 신학자들의 활동 때문이었을까? “아우구스티누스는 때때로 자신의 동시 창조 이론에서 벗어났다”(117쪽).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는 확실한 해석이 아니라 가능한 해석으로만 제시되었으며, 대체로 …” (원문 각주 인용문은 이 지점에서 계속 이어진다).

[41] “신학은 성급하게 양보하거나 이른바 과학적 결과와 합의를 이루려는 태도를 경계해야 한다. 그러한 결과는 더 철저한 연구에 의해 언제든 무너지고 그 근거가 없다는 사실이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Bavinck, 133쪽.

[42] 『하나님은 엿새 동안 창조하셨는가?』(Did God Create in Six Days?), J. A. Pipa, Jr.와 D. W. Hall 편, 제3장(W. D. Rankin과 S. R. Berry 집필).

[43] 같은 책, 제1장(M. H. Smith 집필), 24쪽.

[44] 예를 들어 H. Ross와 G. L. Archer의 미출판 원고 「기간으로서의 날 해석」(“The Day-Age Interpretation”), 미주 109번을 참조하라.

[45] Bavinck, 앞의 책, 250쪽. “기적은 자연법칙을 위반하는 것이 아니며 자연 질서에 대한 개입도 아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기적은 일상적인 사건보다 하나님을 그 원인으로 더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삼는 행위가 아니다. 또한 하나님의 작정과 세계의 계획 안에서 기적은 다른 자연 현상과 마찬가지로 질서 있고 조화로운 자리를 차지한다. 기적에서 하나님은 다른 힘과 마찬가지로 특정한 힘을 작동시키실 뿐이며, 그 힘은 …” (원문 인용문은 이후 계속된다).

[46]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5장 제3항.

[47] “사물의 기원은 그 이후의 발전과는 언제나 다른 법칙에 의해 지배된다. 피조물에게 적용되는 법칙은 창조의 규칙이 아니며, 하물며 창조주의 규칙은 더더욱 아니다.” Bavinck, 132쪽.

[48] 이 설명은 특히 간격 이론(Gap Theory), 기간으로서의 날 해석(Day-Age), 점진적 창조론(Progressive Creation) 견해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49] “창조 이후에 일어나는 하나님의 모든 외적 사역(ad extra)은 그분의 섭리 사역이다.” Bavinck, 244쪽. 또한 “창조와 섭리 모두에서 역사하는 것은 동일한 하나님의 전능하고 편재하는 능력이다.” Bavinck, 247쪽.

[50] Robert Alter는 이 구절을 “주 하나님께서 땅에서 모든 나무가 자라나게 하셨다…”로 번역한다. Genesis: Translation and Commentary (New York: Norton, 1996), 8쪽.

[51] Bavinck, 138쪽.

[52] 같은 책, 138쪽.